양성애: 열두 개의 퀴어 이야기

🔖 그렇다면 다시 질문해보자. 양성애란 무엇인가? 양성애자 여성이란 무엇인가? 어쩌면 이러한 질문 자체가 처음부터 틀린 전제에서 출반한 것일지 모른다. 인간이 성적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젠더 정체성이라는 틀을 벗어나면 안 되며 이때 젠더 정체성이란 두 개의 항, 즉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항으로만 구성된 것이므로 성애에 대한 어떤 논의든 여성/남성이라는 이항 안에 갇혀서 논의되어야 한다는 전제 말이다. 인터뷰에 참여한 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이 이항적 틀을 벗어나 있다. (...) 가버와 스토가 지적하였듯 양성애/여성의 모호한 위치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그것이 이성애/남성중심적 규범과 맺는 관계를 규명하는 것은 성과 성차에 대한 이분법적 인식론을 통해 안전하게 지켜지고 있는 이성애/남성중심성을 새롭고 해체적으로 의미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던져준다.


🔖 버틀러는 여기에서 그러면 성sex은 생래적으로 주어지는 것인지를 묻는다. 그리고 수행성 개념과 인지 가능성에 기반한 문화적 의미화에 대한 논의를 통해 성차뿐만 아니라 성 자체도 구성된 것이라고 말한다. 성차가 문화적 구성물로 주어지는 것이므로 각 성과 성차가 절대적인 연관관계를 가질 이유가 없고 성이 두 개의 범주로 분리된다고 해서 성차가 이에 상응해 반드시 두 범주로 이해되어야 할 이유도 없다. 버틀러는 성의 의미가 성차의 의미처럼 문화적으로 구성되는 것이고 문화적으로 구성된 의미를 통해 성을 인지할 수 있을 뿐이라면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은 성이 아니라 성차였다고 해야 한다고 말한다. 성이 이미 성차화된 문화적 범주라면 성에 대한 문화적 해석인 성차와 성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버틀러는 성차뿐만 아니라 성 자체도 구성된 것일 뿐이라고 역설한다. 따라서 몸에 기반한 성은 전담론적인prediscursive 해부학적 사실로서의 자격을 가질 수가 없다. 성은 언제나 성차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과 성차를 구분해서 인식하는 것 자체를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볼 수 있다. 성이 문화가 있기 이전에 이미 있었던 전담론적 성격의 것이 아니며 따라서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성의 생산을 전담론적으로 보는 것 자체가 성차의 생산에 따른 문화적 장치의 효과라고 볼 수 있다. 전담론적인 성이라는 의미를 만들어내는 담론생산의 작동과정 자체가 이성애적 가부장체제의 권력이 재생산되는 장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 이리가레이에 따르면 남근이성중심적 문화에서 여성과 여성적 쾌락은 말해질 수 없다. 왜냐면 여성의 쾌락, 즉, 음핵의 능동성과 질의 수동성 등에서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쾌락, 다양하고 복잡하고 예민하며 저마다의 차이를 가지고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어서 하나의 무엇만으로 상징해야 하는 상상력 속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쾌락을 남근이성중심적 문화 안에서 의미화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물과 존재에 단일하고 고정된 의미를 부여하는 남근이성중심적 인식론으로서는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여성적인 것, 규저어 자체를 거부하고 부정하며 어떠한 ‘적당한’ 이름도 가지지 않는 여성적인 것, 즉, 특정한 하나one로 규정되지 않기 때문에 없는 것none으로 간주되며 형태상 가식적인 오직 하나의 성기인 페니스penis의 부정, 반대 혹은 역전reverse으로만 인식될 뿐인 ‘여성적인 것’을 의미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리가레이는 여성은 남근이성중심주의가 그녀에게 부여한 성의 단일함 그 이상이고 또한 전혀 다른 것이라고 말한다. 여성적인 것은 고정되고 완결된 코드와 틀을 가지고 들으려 할 때는 들리지 않는 말이고, 정착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고정되지 않기 위해 해체되면서 다시 구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성은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동시에 모든 것을 생각하며 분리와 경계짓기를 거부하고 어느 것 하나만 선택하라고 하는 강요 앞에서 그리고 오직 남성의 반대항의 위치만을 점하라고 하는 강제 앞에서 모든 것으로 남기 위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주체다. 한 사람의 여성으로 있다는 것은 자기 쾌락의 어떤 것도 어떤 다른 것을 위해 희생하지 않는 가능성, 자신을 다른 어떤 것과도 동일하지 않는 가능성, 결코 한가지만이 될 수 없다는 가능성만을 의미한다. 그리고 전혀 다른 체계인 이 체계는 남성과 남성의 대항으로서의 여성만을 유일한 구도로 상정하는 단일한 체계를 통해 쾌락을 양분화하는 시도를 분쇄한다. 여성은 소유하지도 않고 동일시하지도 않은 채 타자와의 쾌락을 교류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이 갈구하는 것은 특정한 어느 것도 아니고 동시에 모든 것이다.

이리가레이는 지금까지 여성의 삶의 조건과 변화는 이와 같은 여성의 욕망을 충분히 해방시키지 못했으며 지금까지의 어떠한 이론이나 정책도 여성의 욕망이라는 역사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충분히 알고 있지도 못하다고 말한다. 또한 여성의 성에 대한 지금까지의 해석 자체가 남근이성중심적 가부장 문화에 기반해 있다고 비판하면서 남근질서로 설명될 수 없는 여성의 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어 이전에 있었고 따라서 언어 너머에 있는, 전문화적이고 전담론적이며 전역사적인 것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이리가레이는 여성적 문화읽기를 강조한다.


그런데 신기한 건 그 사람들한테 없거나 희미해지는 게 내가 내 스스로를 정체화하는 데도 영향을 미치더라구요. 나는 계속 그 공간에서 의미나 위치에 대한 욕구가 있는 상태고 하지만 사람들한텐 내가 희미한 상태고. 그 희미한 상태를 뚜렷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내가 계속 나를 오픈해야 되는데 나는 날 오픈할 수 없고. 그러면 내가 내 미래에 대해서 상을 그리는 건 내 의지나 능력이나 공력의 영향력이 너무 큰 거예요. 내가 감당해야 하는 영역이 너무 커지잖아요. 근데 별로 내가 그걸 해소하기에는 아직 힘이 부족하니까. 그렇기 때문에 제가 제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흡수될까봐 두렵다라고 했던 기억이 나는데. 어디에 흡수될까봐 두려운 거예요라고 얘기를 했을 때 특히나 내가 있는 공간이 가장 일반적이고 평범한 이성애자들의 공간이기 때문에 그 공간에서 나는 계속 희미해지고 내가 끊임없이 내 자신에 대해서 돌아보고 이런 부분에 대해서 자극받고 그러지 않으면 내가 이성애자가 되는 건 아닌데 그냥 내가 희미해질 것 같은 거예요. 그니까 희미한 얼룩처럼 될 거 같은 거야. 그런 불안이 계속 있어요. 그래서 나는 이러고 집에 혼자 앉아서 난 바이섹슈얼이야 이렇게 나 혼자 얘길 한다고 해서 혹은 나한테 남자애인이든 여자애인이든 있었다고 한다고 해서 지금 당장에 그럼 나는 뭐지 한다면 희미한 얼룩 같은 거지.


🔖 양성애는 어떤 의미에서 동성애와 이성애 사이의 경계지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경계지대의 환경과 성격은 명확히 규정되어 있는 것도, 특정하게 고착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경계의 양쪽 지역이 서로 어떤 관계를 갖느냐에 따라 경계지대가 갖는 성격도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접경지대의 거주자들은 ‘생존과 번영을 자신들이 속해있는 곳의 정책이 아닌 다른 곳과의 공존과 공생에 기초’하기 때문에 경계지대적 정체성 또한 접경한 다른 정체성의 생존과 번영에 영향받을 수밖에 없다.

어떤 면에서는 안잘두아가 ‘메스티자 정체성’이 어느 한쪽의 유산도 부정하지 않으면서 어느 쪽에 있든 다른 쪽에서 획득한 유산을 유용하게 활용함으로써 삶의 가능성과 역량을 확장할 줄 아는 주체로 설정하고 있듯이 양성애적 정체성과 그것이 필연적으로 갖는 유동적 경계 또한 유사하게 인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럴 수 있을 때 그것은 불안의 원천이 아니라 가능성의 원천, 역능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이성애적 규범과 이항적 경계규범이 강력한 곳에서 이러한 가능성과 역능을 온전히 표출하고 향유하는 것이 녹록하지는 않다. 경계의 파수꾼들은 경계 유지를 통해 얻게 되는 것을 위해 기꺼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행위는 실재하는 이상적 위협으로 상존하면서 가능성의 원천을 부정의 언어로 오염시키기도 한다.


🔖 이러한 불안은 관계의 지속성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불편함을 불러오는 것 이상으로, 즉 지속가능한 일상과 실존의 문제로 이어져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것은 매일의 삶 속에서 부지불식간에 드러나 어떤 결정을 내리라고 재촉하기도 한다.

근데 또 나에게 보살핌이 필요한 순간이 있고 보살펴야 되는 순간이 있을 수 있는데 내가 정말 여기서 말초적으로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없는. (중략)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라는 게 나의 진짜 욕구인지 아니면 정말 말초적인 욕구인지 그런 부분에 대해서도 계속 판단을 해야 된다라는 생각이 드는 거죠. 그러니까 그 판단이라고 하는 건 물론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데, 거기에 대한 책임을 내가 지는 거잖아요. 내가 원하는 사람이랑 연애를 하는 것은 나의 판단이지만 그게 어떤 단순한 자극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그게 정말 나의 내적인 욕구와 맞닿아 있는 것인지 차이가 분명히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들고. (중략) 계속 끊임없이 불안이랑 같이 가야 되는 것 같애요. 그런데 불안하기 위해서 그 삶을 선택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이런 불안과 고민은 사회복지가 체계적으로 잘 마련되어 있다면 하지 않아도 될 것들로 보인다. (...) 그러므로 보편적 복지 시스템의 부재는 기혼이성애적 관계를 강제하는 효과를 낳게 된다.


🔖 가버(Garber, 1995)가 말하고 있듯 양성애의 핵심은 이동 혹은 바꾸기shifting 그 자체에, 다중적이고 이동적인 의미 자체에, 파악할 수 없는 유동성 그 자체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동 혹은 바꾸기 자체는 우연히 발생하여 출생하고 다시 소실되는 시간적 존재인 인간이 가진 욕망의 핵심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유동적인 삶의 태도와 실천을 통해 경계를 흐리는 양성애/여성 주체의 이러한 모호성은 경계를 구축함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고착화시키고 그를 통한 자원 흐름의 지배 질서를 공고히 하려는 체제에 양성애/여성 주체라는 횡단적 주체가 던지는 정치적 질문이자 저항이다.

세즈윜은 <Touching Feeling: Affect, Pedagogy, Perfomativity>(2003)에서 언어의 수행성에 대해 설명하면서 ‘나는 000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내가 본질적으로 000이라는 것을, 즉, 과거에 대한 진술을 하고 있다고 보기보다는 미래에 대한 선언의 성격을 갖는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나는 ‘양성애자 여성’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나의 과거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오히려 앞으로 나는 그렇게 살겠다고 선언하는 행위인 것이다.

사회적이고 물질적인 동물인 인간이 실존을 위해 필수적인 사회적 삶을 영위할 수 있기 위해서는 ‘발 디딜 곳’이 불가피하게 필요하다. 그것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발 디딘 곳에 멈추어 있다면 어떤 변화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삶은 정지된 것 이상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이다. ‘발 디딜 곳’은 ‘발 디딘 곳’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발을 옮겨갈 수 있는 곳, 즉, ‘발 디딜 수 있는 곳’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체성이란 일종의 ‘발 디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정체성을 ‘발 디딜 곳’으로 인식할 때 정체성을 고착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인 것으로 새롭게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지금까지 정체성이란 이미 디디고 있는 발을 중심으로 설명되어 왔을 뿐 디디게 될 발 또는 옮겨 디디게 될 곳에 대한 설명은 지속적으로 삭제되어 왔다. 또한 발 디딘 곳과 디딜 곳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설명도 간과되어 왔다. 양성애/여성 주체의 주체성은 디딜 발 혹은 옮겨갈 곳에 대한 설명이 디딘 발과 함께 되어야 하고 그랬을 때 비로소 주체의 잠재력과 그에 기반한 가능성이 삭제되지 않은 채 인식되고 또 발휘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이분법적 사고의 틀 속에 갇히게 되면 틀 밖의 무엇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선폐되기 된다. 틀 밖으로 나올 수 있는 힘, 그리하여 틀지어진 어떤 것이 아니라 될 수 있는 모든 것이 되어볼 수 있는 자유, 초월할 수 있는 자유를 갖는 것, 그것이 양성애/여성의 위치와 같은 유연하고 유동적인 자아 경계를 가지고 있는 횡단적 주체들이 제시하는 정치적 제안이며 도전일 것이다.

—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횡단하는 퀴어 비체, 양성애/여성